인생은 직소퍼즐

저는 고3 수능 때 피똥을 쌌습니다. 정말 제대로 망쳤습니다. 그 시기는 제가 평소에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때에 대해서는 얘기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싫어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가 부모님과의 대화를 통해 인생의 큰 교훈을 얻은 시기이기도 한데, 데이빗과 얘기를 나누며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1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걸 처음 직감한 건 아마 2교시 수리 영역이었던 것 같습니다(2014학년도 수능부터 명칭이 수학 영역으로 바뀌었지만 라떼는 수리 영역이었답니다). 굳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원래 저는 문과적인 소양이 강한 학생이었습니다. 반대로 수학과 과학에서는 늘 애를 먹었죠.

지금도 저와 처음 대화해 보거나 저를 애매하게 아는 분들은 제가 당연히 문과일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 학생이 두 가지 계기로 인해 이과를 선택해서 아주 힘든 고등학생 시절을 보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애매하게 좋았던 성적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어딜 가나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저희 반의 특이한 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2학년 때 이과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문과 소양이 강했지만 저와 친한 친구들이 모두 이과를 선택하니 ‘나도 이과를 가야 하는 건가?’ 하는 혼란에 빠졌죠.

두 번째 이유는 아이언맨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영화 <아이언맨> 시리즈의 첫 번째 편이 개봉했습니다. 그때 심장이 쿵쾅대던 그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물론 아이언맨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과학기술이라는 것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되었죠. 저를 매료시킨 건 빌런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아이언맨이 아니라 자기만의 실험실에서 온갖 기술을 활용하여 이것저것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토니 스타크였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저런 것도 가능할 수 있구나 하는 막연한 환상이 생긴 것입니다.

이 관심은 고등학교까지 이어졌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이언맨2>가 개봉을 했습니다. 그때 한번 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런 기술은 어떻게 배울 수 있지? 일단 물리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지금 제 방에 있는 큰 책장의 한 칸은 제가 고등학생 때 사서 읽은 책들로 가득 차있는데, 대부분이 물리와 관련된 책입니다.

<나의 행복한 물리학 특강>,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학 이야기>,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시리즈, <움직이는 사물의 비밀>, <불가능은 없다>, <스티븐 호킹의 위대한 설계>, <물리와 함께하는 50일>, <한스 그라스만의 모두를 위한 물리학> 등. 멋진 발명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을 공부해야 하고 그중에서 물리를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물리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찾아보니 토니 스타크가 MIT의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고 하네요. 나는 MIT를 갈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기계공학과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상의 캐릭터지만 나도 그처럼 과학기술을 통해 멋진 발명품을 만들어야겠다는 꿈이 생긴 것이죠. 그 시기에 비슷한 인물들을 동경했던 것 같습니다. 세그웨이를 발명한 딘 카멘부터 아이폰을 발명한 스티브 잡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아이언맨의 실제 모델로 더 잘 알려져 있었던 일론 머스크까지.

이러한 이유로 이과를 선택했지만 사실 저는 수학에 영 소질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생활 내내 저를 괴롭힌 수학이 수능에서까지 제 발목을 잡은 겁니다. 수능 2교시 수리 영역 시간에 ‘아 진짜 X됐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능에서 가장 중요한 멘탈 관리에 실패한 채 수리 영역이 끝났습니다. 다행히 영어는 잘하는 편이라 3교시는 편안하게 넘겼지만 2차 고비가 찾아옵니다. 이미 무너진 멘탈을 회복하기에 3교시 하나로는 부족했나 봅니다. 과학탐구 영역도 제대로 말아먹고 제 10대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를 허망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수능이 끝날 때쯤 저희 어머니가 시험장 앞으로 마중 나와 있었지만 저는 못 본 척하고 도망치듯 집으로 빠르게 걸어갔습니다. 제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모두가 사교육에 미쳐있는 사람 같아 보이는 강남 8학군에 살았지만 정말 운이 좋게도 교육열이 그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던 부모님을 두었음에도, 수능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충격은 굉장히 컸습니다.

아마 수능을 본 당일 밤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부모님이 저에게 해주신 말씀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가 지닌 삶의 태도 중 하나로 자리잡아 있습니다. 바로 인생지사 새옹지마입니다.

지금 당장 힘든 일이 닥쳤을 수도 있고, 반대로 정말 기쁜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하나의 독립된 사건으로만 인식되는 그 일이 미래에 어떤 또다른 사건을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지금은 뛸듯이 기쁜 일이 얼마 뒤 나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겪는 고난이 결과적으로 나에겐 더 좋은 열매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순간에 우리는 그 일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거의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순간의 느낌으로 반응할 뿐이죠.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우리는 곧 현재에 서서 뒤를 돌아보며 그 일을 평가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평가는 내가 살고있는 현재에 따라 바뀔 겁니다. ‘그때 그 일이 지금의 나에게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구나’를 계속해서 깨닫게 될 거예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는 인생이 퍼즐 조각이라고 했습니다. 조각 하나만 보고서는 전체 그림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씩, 여기저기서 맞추다 보면 ‘아, 이 조각이 이 그림의 이 부분을 채우기 위한 거였구나’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죠.

여기에 덧붙여 아버지는 애초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이 힘들고 고되보여도 나중에 큰 기회로 다시 나타날 수 있고, 지금 하는 선택이 당장 옳아보여도 나중에 내 인생에 오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버지가 33년 동안 다니셨던 회사는, 아버지가 대학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공부를 가장 잘하는 학생들이 가는 곳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시간이 흘러 돌아보니 아버지의 대학 동기들 중 1~5등을 하던 친구들이 들어가던 회사를 앞질러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는 겁니다.

부모님 얘기를 듣고 제가 지니게 된 삶의 태도는 매사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저 나에게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에 연연하지 않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이 일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제가 수능을 망쳤지만 그로 인해 재수를 하고, 재수를 하며 그 어느 때보다 제 인생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지금 제가 가진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를 퍽 좋아하고 여기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데, 이 중 대부분은 재수를 하며 형성되었습니다(힘든 만큼 고민이 깊어지기 때문..). 제가 저의 삶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성찰하고 고민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재수 생활이었습니다.

또, 재수를 하여 제가 졸업한 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제가 좋아하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이어간 학교 생활이 발판이 되어 쌓아가고 있는 지금의 커리어도 얻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깊이 감사해 마다않는 지금의 제 현실을 갖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늘 마음에 새기고 삽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희일비 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자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