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우주 저 멀리 다른 버전의 나

여러분이 이 레터를 열어볼 때 즈음이면 저는 시드니에서의 3주 워케이션을 마치고 한국에 와있겠네요.

시드니라는 낯선 도시에서 원격근무를 하는 것은 저에게 정말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늘 똑같은 환경에서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생각, 하지 못했을 경험을 했어요. 여러분도 기회가 된다면 꼭 (시드니가 아니더라도) 나를 새로운 환경에 놓아보는 경험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드니에서의 일상

시드니에서 제 하루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1. 출근 전 루틴 : 출근이 10시였기 때문에, 그 이전의 아침 시간을 생산적으로 쓰고 싶었어요.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루틴을 가졌습니다. 워케이션은 단순히 여행이 아니라 내 일상을 해외로 가져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일상을 지켜주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저에겐 그것이 출근 전 루틴이었구요.

2. 업무 :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7시까지는 회사 일을 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시간이었죠.

3. 시드니 즐기기 : 시드니를 본격적으로 즐길 수 있는 건 퇴근 이후였습니다. 평일에 여기저기 투어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평일에는 거창한 걸 하기보다는 밤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오페라하우스 근처 부두를 걸으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바에 가서 시원한 맥주를 한잔 하기도 했습니다. 

심심해서 안 되겠다

저는 I와 E가 딱 반반씩 나오는 사람이라,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노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혼자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하는 것도 좋고 혼자 생각에 잠기는 것도 좋았는데요, 역시 심심하긴 하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을 좀 만나봐야 하나, 생각하던 와중에 Pub crawl이라는 문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얘기하면 시내의 여러 술집을 여기저기 다니며 술 먹고 노는 문화였습니다. 현지인도 많고 저와 같은 관광객도 많이 있더라구요.

Pub crawl은 8시에 시작해서 거의 올나잇으로 진행됩니다. 공식적으로 끝나는 시간은 2시인데(!) 사실상 바 닫을 때까지 계속 놀면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렇게 진행돼요. 8시에 첫번째 술집에서 다같이 모입니다. 첫번째 술집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총 네 개의 술집을 가기 때문이죠. 첫번째 술집에 들어가면 팔에 팔찌를 채워주고 종이 티켓을 한장 줍니다. 그 팔찌가 오늘 “crawl”할 네 개의 술집들의 입장권이고, 종이 티켓은 각 술집에서 하나의 무료 술을 받을 수 있는 교환권입니다. 한 술집에서 1시간 정도 놀고, 다같이 다음 술집으로 이동해서 거기에서 또 공짜 술 받고 술먹고 1시간 지나면 또 옮기고 그런 식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안에서 사람들을 모아 어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방식인 줄 알았습니다. 비어퐁과 같은 게임을 하든지,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등의 콘텐츠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죠. 큰 착각이었습니다.

팔찌 찼고, 공짜 술 받았지? 그럼 알아서 춤추고 놀아~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한가운데에는 DJ가 있었고 그 앞에는 사람들이 춤출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아 저는 클럽을 너무 싫어하는데 말이에요. 심지어 사람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최소 50명은 있었던 것 같고, 진짜 많을 때는 150명도 온다고 하더라구요.

"Hey, where are you from?"

일단 공짜 술을 차마 마다할 수는 없으니 받으러 갔습니다. Scary Canary라는 이름의, 파란색 레몬에이드를 탄 보드카였는데 사실 술맛은 거의 안 나고 단맛만 나는 음료였습니다. 공짜 술이 그렇죠 뭐.

바텐더에게 공짜 술을 받고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노나 보려고 하던 찰나에 뒤에서 어떤 남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Hey, where are you from?"

뒤를 돌아보니 머리를 군인처럼 짧게 깎고 체구는 저와 비슷한 동양인 남자가 서있었습니다. 저는 반갑게 인사하고 저를 소개한 뒤 되물었습니다. "Where are you from?" 피부가 까무잡잡한 것으로 보아 저는 태국이나 베트남, 대만 셋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고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I’m from Brisbane." 호주의 다른 도시인 브리즈번 사람이었던 겁니다. 호주와 같은 다인종 국가에서 외모만 보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질문을 하다니, 아차 싶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0.1초 정도 당황했는데, 제 표정을 그새 읽었는지 그는 “My parents are from Vietnam.”이라고 덧붙여줬습니다. 브리즈번에서 태어난 이민 2세였던 겁니다. 제가 여기에는 처음 와봤다고 하니 그는 "I come here every weekend"라고 답했습니다. 오.. 위 콜 댓 “죽돌이” 인 코리아 유노? (라고 알려주려다가 말았습니다)

데이빗이라는 이름의 그 친구는 국방부 소속 군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얘기를 좀 나눠보니, 데이빗은 원래 자동차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대학도 가지 않고 고등학생 때부터 자동차 정비공 일을 오래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지금까지 살면서 차를 30대 정도 가져봤다고 해요. 중고로 사서 타다가 팔고, 다른 차를 또 중고로 사서 조금 타다가 팔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대단한 열정이죠.

그런데 왜 뜬금없이 국방부에서 일을 하게 되었냐고 물어보니, 12년 정도 정비공 일을 해왔는데 어느 날 뒤를 돌아보니 돈도 얼마 벌지 못했고, 또 무엇보다 정비공이라는 일에 질려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또 이제 컴퓨터로 하는 행정 일을 해보고 싶어서 국방부에서 지도와 관련된 일을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신기한 커리어죠.

여기가 본론

사실 지금까지는 서론이었습니다. 이 이후에 데이빗과 나눈 대화가 계속 제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소개드리려고 해요. 지금까지의 제 커리어를 돌아보고, 또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한 세 번째 술집에 갔을 때였을까요, 술이 좀 들어가니 데이빗은 정비공 일을 한 것을 후회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아니 자동차를 너무 좋아해서 한 일이라면서? 네가 엄청 좋아하는 일을 한 건데 너무 좋은 거 아니야? 라고 묻자 그래도 후회된다고 합니다. 그 일을 하며 돈도 거의 모으지 못하고 탄탄한 커리어를 만들지도 못했다면서요.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습니다. 정비공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데이빗이 서른 살에 완전히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지 않아도 되었을 수 있으니까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빠지는 딜레마겠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것이냐, 당장 돈이 되는 일을 할 것이냐. 하지만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위로 반 + 제 생각 반을 덧붙여 얘기해줬습니다.

결과론적으로만 생각하는 거 아냐? 이렇게 생각해봐.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내리는데, 그 선택을 내릴 때마다 여러 가지 버전의 '나'가 생겨. A라는 선택을 내린 '나', B라는 선택을 내린 '나', C라는 선택을 내린 '나' 등등. 그런데 중요한 건, A를 선택한 나는 절대 B를 선택한 내가 어떤지 알 수 없어. 절대. 그러니까 버전 A의 나는 버전 B의 내가 행복한지,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지 이런 것들을 절대 알 수 없다고.

그러니까 너는 지금 고등학생 때 정비공 일을 택하지 않았을 너를 부러워하고 있지만, 만약 그때 정비공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했다면 아마 그 버전의 너는 지금 버전의 너를 부러워하고 있을 수도 있어. 아 내가 진짜 열정이 있는 분야에 도전해볼 걸, 하면서. 물론 모르는 거긴 하지만. 그리고 나는 솔직히 그 정도 열정을 갖고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 같아.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

아, 남의 인생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얼마나 쉽고 무책임한가요. 데이빗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인생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숙취와 함께 이때의 대화가 머릿속에 맴돌더라구요. 이런 조언을 해준 나는 정작 어떤 삶을 살고 있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마음은 알고 있는데 용기가 없어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건 아닌가? 평행우주 어딘가에 있는 다른 버전의 나를 부러워하기만 하면서 살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인생 설계와 커리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다른 버전의 나, 그러니까 과거의 어떤 시점에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했을 나를 막연히 부러워하고 있지는 않나요?

뒷이야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으러 오신 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데이빗과 얘기하던 중 다른 친구 두 명이 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한 사람은 호주 사람으로 영화계에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가는 친구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인도에서 개발자로 일하다가 시드니에 와서 석사를 따고 현재 컨설팅 회사에서 데이터 컨설턴트를 하는 친구였습니다.

데이빗은 저에게 저런 사람들이 자기는 너무 부럽다고 털어놨습니다. 저렇게 탄탄한 경험과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들이 정말 부럽고, 그래서 자기가 했던 일이 더 후회된다고요.

저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탄탄한 경력을 쌓아가는 사람 중에 정작 자기 열정은 모르는 사람도 수두룩하다고, 그리고 나중에 가서야 자기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사람들도 많다고 얘기해줬습니다. <싱크 어게인>이라는 책에 나온 몰입 상승과도 같은 얘기입니다. 어차피 삶은 일직선이 아니지 않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