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함을 베풀 기회가 있다면 잡자

사소한 친절

시드니에서 3주 동안 워케이션을 하며 느낀 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문은 뭐 한국과 같이 거의 누구나 언제나 잡아줍니다. 캐리어를 끌며 걸어가던 한 아주머니가 길에서 넘어졌는데 정말 그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한달음에 달려와 도와줍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 정거장에서 백발의 할아버지가 탑승했는데요. 그러자 제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의자에 벌레라도 나타난듯 벌떡 일어나더니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덕분에 그 할아버지는 두 자리 중 하나를 골라야 했고, 선택받지 못한 자리의 주인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재밌는 것은 그 버스가 만석도 아니었다는 거예요. 뒤쪽에 자리가 있었음에도 출입문 쪽에 앉아있던 사람 둘이 자리를 내어주려 한 거죠.

사실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느끼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친절함을 베풀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러고자 하는 의지는 있더라도 선뜻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주저하는 것 같아요. 부끄럽게도 저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시드니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어요.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친절하지는 않겠지만, 서울에서 30년째 살고있는 사람으로서 서울보다는 훨씬 여유롭고 친절한 것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가장 많이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들 많이 웃는지 모르겠어요. 뭐만 하면 그냥 웃습니다. 양보해주면 웃고, 문 잡아주면 웃고, 지나가다가 눈만 마주쳐도 웃고. 가끔은 지금 이 상황에서도 웃어줘야 하나? 하며 눈치를 보게 될 정도였습니다.

친절의 전염성

이러한 친절함,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미소 속에 둘러싸여 있어서 좋은 점은, 저도 거기에 동화된다는 것입니다. 딱히 남에게 친절을 베풀 이유가 없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러니 저도 그렇게 행동하게 되더라구요. 시드니 1일차부터 저도 헤벌레 하면서 눈웃음 지으며 헬로우 하우아유 이러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점심을 먹을 때였습니다. 동생과 근처 푸드코트로 점심을 먹으러 갔어요. 시드니 중심지에는 직장인들이 아주 많다 보니 유명한 프랜차이즈들이 들어서있는 푸드코트를 여기저기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와 동생은 서브웨이와 비슷한 메뉴를 파는 가게를 택했고, 저는 미트볼 랩을 시켰습니다. 랩 주제에 15,000원 가까이 하더라구요. 잔인한 도시입니다.

얼마 뒤 주문한 랩이 나왔는데, 그토록 비싼 이유가 이해됐습니다. 길이가 거의 30센치에 달하고 두께는 스타벅스 텀블러 수준인 미트볼 랩, 상상이 되시나요? 자리로 와서 포장을 뜯어보니 그 육중함을 이기지 못해 토마토 소스는 밖으로 새어나오고 야채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먹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한입, 한입 베어물 때마다 소스가 주륵주륵 흘러나오며 입가에 덕지덕지 묻었습니다. 연신 냅킨으로 입을 닦아내며 먹었습니다.

여기서 퀴즈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식사를 마친 뒤 우리 테이블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있던 자리에 우산이 하나 놓여져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20미터 넘게 멀어져가고 있구요. 이때 당신의 다음 행동은?

솔직히 얘기하자면, 한국에서의 무심한 저였다면 그냥 무시했을 것 같습니다. 저 사람들 우산이 아닐 수도 있지. 그래서 그냥 두고 간 게 아닐까? 아니야 그래도 가서 말해줘야 하나? 괜히 오지랖 부리는 거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지 않을까? 저렇게 가다가 곧 기억해내고 다시 가지러 오지 않을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느새 그들은 저 멀리 사라져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시드니에서 현지인들의 친절함을 맛본 버전의 저는 달랐습니다. 입가에 미트볼을 덕지덕지 묻힌 채 달려가..다가 이 꼴로 가면 두 사람이 저를 보고 도망칠 것 같아서 얼른 자리로 돌아와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다시 달려갔습니다.

“Excuse me ma’am, I think you left your umbrella.”

둘은 제 뒤로 자신들이 앉아있던 자리를 보고는 “오오 땡큐 쏘 머취!”를 외친 뒤 달려가 우산을 집어왔습니다.

자리로 돌아와서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나였으면 못(안)했을 것 같은데. 생각만 하다가 그냥 지나쳤을 것 같은데 여기에선 왜 그랬을까. 외국인이라서? 괜히 영어 써보고 싶어서? 몇 가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지만, 결론은 여기 사람들이 친절해서였습니다. 저를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절하니, 저라는 사람 자체도 더 나이스해지고 긍정적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동생과 얘기했습니다. 친절함도 전염되는 것 같다. 내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친절하면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렇기 때문에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평소 나를 스쳐지나치는 사람들한테도 웬만하면 잘해주는 게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친절을 베풀 기회

너무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저는 일상에서 베푸는 친절함이 한 사람의 하루를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그 사람 자체도 더 친절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도 믿구요.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무심코 건네는 냉담함, 심지어 비웃음과 냉소가 누군가에게 쌓이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은 물론 이 사회를 증오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차가운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건 한 사람의 행동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브래드 피트가 2020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라는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을 때였던 것 같은데요, 수상소감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Hey, if you see a chance to be kind to someone tomorrow, take it. I think we need it.”

기억 저편에 묻혀있던 이 한 마디가 그날 난데없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에 잘 새겨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