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튼 레터] 돈과 시간을 확실하게 낭비하는 방법
폴 그레이엄의 에세이
안녕하세요, 167번째 휴튼 레터입니다. 오늘은 폴 그레이엄(Paul Graham)의 글을 번역해서 소개드리려 합니다. 제가 이미 과거에 자주 소개드린 바 있지만, 간단하게 소개드리면 폴 그레이엄은 실리콘밸리의 전설적인 투자자입니다. 그의 명성은 동방의 작은 나라에도 미쳐서, 아마 우리나라 스타트업계 사람 중 폴 그레이엄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개발자 출신인 폴 그레이엄은 제가 아직 걸음마도 못 뗐을 1995년에 Viaweb이라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하였고, 3년 뒤 야후에 매각합니다. 이후 그는 투자자로 전향하여 Y Combinator라는 세계적인 스타트업 보육기관을 설립합니다. Y Combinator은 선발되는 것 자체만으로 초기 스타트업에게는 엄청난 영예입니다.
그는 2001년부터 자신의 홈페이지에 꾸준히 에세이를 써서 올리고 있습니다. 그는 투자자로도 유명하지만, 인사이트가 넘치는 글쟁이(?)로도 굉장히 유명합니다. 정말 주옥같은 글들이 많습니다. 다만 대부분 스타트업과 프로그래밍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쪽에 관심이 없다면 그의 글 역시 딱히 재미가 없으실 텐데요, 그중 몇 개는 우리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라 종종 소개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번역해드릴 아티클 역시 그런 종류입니다. <How to Lose Time and Money>라는 에세이에서, 폴 그레이엄은 돈을 잃는 방법과 시간을 잃는 방법이 서로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잘 번역해서 소개드리겠습니다. 원문의 메시지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의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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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부터는 번역)
1998년, 창업한 회사를 야후에 매각한 뒤, 저에게는 갑작스럽게 큰 돈이 생겼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이제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죠. "어떻게 하면 이 돈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저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자 역시 가난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동안 어떻게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될 수 있을지만 공부해왔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다시 가난해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죠. 그런 비극을 피하려면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어떻게 재산을 잃는지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어렸을 때 누군가 저에게 부자들이 어떻게 가난해지는지 물어봤다면, 저는 "돈을 흥청망청 다 써버려서"라고 답했을 겁니다. 제가 책이나 영화에서 본 모습은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재산은 과도한 소비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투자 때문에 잃게 됩니다.
돈을 흥청망청 쓸 때는 피부로 느껴집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수백 수천 만원을 쓸 때 "와, 나 지금 돈 진짜 많이 쓰고 있다"라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파생상품과 같은 복잡한 금융 상품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면 수억 수십억까지도 정말 순식간에 잃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품에 돈을 쓸 때 머릿속에서 경고 신호가 울립니다. 예를 들어 아주 비싼 가방을 사거나 스포츠카를 살 때처럼요. 그런데 투자는 그런 신호가 울리지 않습니다. 왜냐면 투자는 돈을 지출하는 게 아니라, 마치 돈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그냥 옮기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에게 뭔가 비싼 걸 팔아먹으려고 할 때마다 하는 말이 "좋은 투자라고 생각하세요"인 거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고 신호를 만들어야 합니다. 근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죠. 왜냐면 우리가 돈을 흥청망청 쓰지 않도록 막아주는 경고 신호는 거의 우리 본능에 내재되어 있지만, 나쁜 투자를 막는 경고 신호는 따로 배우고 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직관과 충돌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저는 최근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시간도 돈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시간을 잃는 가장 위험한 방법은 말초적인 쾌락만을 위한 일을 하면서 시간을 쓰는 게 아니라, '가짜 일'에 시간을 쓰는 겁니다.
마냥 즐거운, 쾌락을 위한 일을 할 때는 돈을 흥청망청 쓸 때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고 신호가 금방 울리죠. 만약 주말에 소파에 앉아서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TV만 본다면, 뭔가 지금 엄청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겁니다*. 상상만 해도 불편하지 않나요? TV를 2시간만 봐도 기분이 이상할 텐데, 하루 종일은 말할 것도 없죠.
*마치 30분동안 생각없이 릴스를 보고 난 뒤 느껴지는 현타처럼요.
그런데도 저는 차라리 하루 종일 TV를 보는 게 나았을 날들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 날들은 하루를 마무리할 때 오늘 한 일이 뭔지 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뭔가 바쁘게 보냈지만 사실상 한 게 아무것도 없어"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날을 보내고 나면 물론 기분이 나쁘지만, 사실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 TV를 봤을 때만큼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하루 종일 TV만 보는 날에는 제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최소한 머릿속에서 경고가 울리긴 하는 거죠.
하지만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날, 그러니까 '가짜 일*'에 몰두한 날에는 그런 경고가 울리지 않습니다. '진짜 일'처럼 보이는 일들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메일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하나하나 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쨌든 책상에 앉아서 뭐라도 했잖아요. 이건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나는 지금 일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생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무 쓸모도 없는 일
그래서 시간도 돈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쾌락이나 즐거움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고대 수렵 채집인, 그리고 아마 산업화 이전의 모든 사회에서는 충분했을 겁니다. 예전에는 모두가 그저 자기가 가진 욕심을 자제하는 정도면 됐으니까요. 하루 종일 밖에서 술 먹고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꾹 참으면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욕구를 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금 시대에 가장 위험한 함정은, 시간을 낭비한다고 느껴지지 않아서 마치 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입니다. 우리 머릿속에서 경고가 울리지 않고, 우리는 경계를 늦추게 되죠. 이게 가장 위험한 함정입니다. 그리고 사실 더 나쁜 건 그런 행동들은 재미조차 없다는 거고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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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셨나요? 저는 이 아티클을 읽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지금 내가 '가짜 일'을 하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였습니다. 위 에세이에서는 일상적으로 하는 일 중에서의 '가짜 일'을 언급했지만(이메일 처리처럼), 누군가는 몇 년을 통째로 '가짜 일'에 쏟아부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스스로 모르는 채로요.
다른 하나는 비판적인 코멘트인데요, 어떤 일이 '진짜 일'인지 '가짜 일'인지는 어느 정도 결과론적인 얘기라는 겁니다. 할 때는 모른다는 거죠. 물론 명백한 '가짜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와 가짜'가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는 일의 경우, 지금 이 경험이 정말 낭비인지, 아니면 성장을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시행착오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후자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피해버린다면, 아마 우리는 평생 성공 주변만을 맴돌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의 결론은 내 삶에서 무엇이 '가짜 일'인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최대한 제거를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효율만을 추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입니다. 100% '진짜 일'로만 우리 일상과 삶을 채울 수는 없을 테니까요. 오히려 그런 강박이 삶을 경직되게 만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돌아보니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일이었다고 느껴지는 경험이 있나요?
다음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