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튼 레터] 부끄럽지 않게 살기
선과 악을 염치로 판단하기
안녕하세요, 이번 레터에서는 선과 악에 대해서 얘기해보려 합니다. 제가 늘 우러러보는 사람은 본인의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본인의 직업을 단순한 돈벌이 이상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깊이 몰입하는 분들입니다.
얼마 전 제가 사랑하는 프로그램 유퀴즈에 부산지방법원의 박주영 판사님이 출연하셨습니다. 사실 저도 누군지는 몰랐는데요,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고 '아, 또 한 명 찾았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본인의 일에 철학을 갖고 있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다
저는 평소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쉽게 말해 ‘이거 이렇게 해도 되나?’에 대한 고민이죠. 제가 특별히 도덕적인 사람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저 최대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유퀴즈에 출연하신 박주영 판사님은 정의나 선과 같은 개념들이 물론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추상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추구하다가 헤매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그 이유는 선과 악의 경계가 무척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는 선과 악은 대개 명백한 예시들입니다. 누가 봐도 선, 누가 봐도 악인 경우들이죠. 하지만 현실에는 선과 악 그 경계에 있는 상황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러한 모호함 때문에 결국 ‘무엇이 옳은 거지?’에 대한 고민을 포기하게 된다고 해요. 머리 아프니까요.
정해진 답은 없다
대학생 때 <On Justice>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습니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원서로 읽고 토론하는 교양 수업이었는데 토할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대학생활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강의였습니다.
그 수업은 매번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번 시간에 A라는 개념을 배웁니다. 그럼 ‘아, 이게 옳은 거구나. 선과 악의 기준은 A구나'를 깨닫고 집에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이 되면 교수님은 그것을 반박하는 이론 B를 가져옵니다. 그럼 ‘아, A가 아니고 B가 옳은 거구나' 하고 집에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 시간이 되면 역시나 교수님은 그것을 반박하는 이론 C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수업 끝에 얻은 결론은 ‘유일한 정답은 없다'입니다. 박주영 판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헤매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접근하면 결국 정답은 없거든요.
이론과 현실의 괴리
수업 내용으로는 가령 이런 게 있었습니다. 첫 번째 수업에서 ‘다수의 행복이 극대화되는 선택을 하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다'라는 이론(공리주의)를 배웁니다. 맞는 말이죠. 그래서 아, 어떻게든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는 것이 옳은 선택이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 시간에 교수님이 이를 반박합니다. 그럼 100명의 행복을 위해 1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한가?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개인은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내리는 것이 옳다는 이론을 배웁니다. 그럼 또 아, 이게 도덕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 시간에 교수님이 또(!) 이를 반박합니다. 그럼 선의의 거짓말은 정당화할 수 있는가? 칸트는 모든 거짓말은 부도덕하다고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면 그 사회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아래와 같은 예시를 듭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집 문을 두드리며, 누가 자신을 해치려고 쫓아오는데 좀 숨겨줄 수 있겠냐고 합니다. 그래서 숨겨줬습니다. 그런데 그 괴한이 우리집을 찾아와 그 사람이 여기에 있냐고 물으면? 칸트는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도덕적인 선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요? 아니라는 것이죠. 이렇듯 이론과 현실에는 종종 괴리가 있고, 이것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어려움을 줍니다.
염치로 판단하기
이렇게 도덕은 철학적으로 접근하면 머리만 아픕니다. 박주영 판사님도 이러한 맥락에서 말씀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모호함 때문에 결국 우리는 ‘무엇이 옳은 거지?’에 대한 고민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도덕철학(윤리학)은 나름의 중요한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 삶에 간편하게 적용하기에는 너무도 모호하고 이상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박주영 판사님은 우리가 바로 느낄 수 있는 ‘염치'로 판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에 엄밀한 잣대를 들이밀기엔 도덕이 너무 어려우니, 내가 이 행동을 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라는 질문으로 옳고 그름을 어느 정도 판단하자는 것이죠.
사실 이것 역시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차가 잘 다니지 않는 짧은 횡단보도 앞에 서면 '이 정도면 빨간 불에 건너도 되지 않나?' 싶은 마음이 문득문득 듭니다. 그런 마음들을 억누르는 게 아마도 염치에 따라 사는 것일 테고, 이것이 결코 쉬운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바로 판단할 수는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가 이토록 모호한데,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본 경험이 있나요? 그때 어떤 선택을 내렸나요?
다음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