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튼 레터] 생각하지 않으면 악에 물든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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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튼 아버지
2024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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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71번째 휴튼 레터입니다.

우리가 ‘나쁜 놈’을 얘기할 때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라든지, 폭력적인 사람이라든지, 자신의 권력을 위해 헌법 따위 무시하는 국가 지도자라든지, 국민을 우습게 아는 정치인이라든지요.

마치 나쁜 놈은 평생 나쁜 놈으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좋은 놈 vs 나쁜 놈’으로 명쾌하게 구분되면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만은,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도 얼마든지 나쁜 일을 저지를 수 있고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도하지 않더라도요.

이 불편하고 불쾌한 생각은 제 머리에서 나온 건 아니고(그러니 저한테 뭐라 하지는 말아주세요), 나치 독일 시절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가 한 이야기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

“나는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한 말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히틀러 정권 아래에서 600만(!) 유대인 학살의 총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짧게 말하면 홀로코스트의 핵심 인물입니다. 더 짧게 말하면 개새끼입니다.

그는 재판 내내 이러한 주장을 펼칩니다: 나는 그저 체계에 의해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며,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이 죽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내 자리에 있었어도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내가 한 행동이 도의적으로는 잘못된 것이었을지 몰라도 나는 악한 의도가 없었고, 그저 주어진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기 때문에 나는 법적으로는 죄가 없다.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을 현장에서 참관하며 아이히만을 직접 관찰하였고, 그 내용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출간합니다.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인물을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아마 전형적인 악마의 모습이 떠오를 겁니다.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함’으로 치장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재판 현장에서 아이히만을 실제로 본 한나 아렌트는 놀라움과 함께 그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이히만은 셰익스피어에 등장하는 맥베스 같은 악의 화신을 떠올리게 하는 사악함도 없었고, 유대인 혐오자도 아니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명령 복종을 의무로 여기고, 의무를 지키는 행위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아이히만의 정신 상태를 감정한 의사 여섯 명 역시, 그를 두고 “아이히만은 끔찍할 정도로 정상적”이라고 얘기했다고 해요. 심지어 그는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좋은 동료였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그의 모든 정신적 상태가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함”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저지른 악행을 가려둔 채로 보면, 아이히만은 매우 평범한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악의 평범성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악의 평범성이란, 거대한 악행이 반드시 잔인하거나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없이, 비판 없이, 주어진 역할을 수동적으로 수행하기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벌어질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더 정확히는, 자신이 하는 행위를 보다 폭넓게, 타인의 관점에서 고려하지 못한 채 1차원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면 누구나 (의도치 않게) 악행에 가담할 수 있게 된다는 개념입니다.


무사유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무사유(thoughtlessness)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아이히만에게 생각하는 능력 자체가 결여되어 있는 듯해 보였다고 썼죠.

그는 너무 단순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야는 좁았고 생각은 얕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고, 자신이 하는 일이 가진 파급 효과를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무사유’입니다.

어쩌면 나치 입장에서 아이히만은 그 일에 적임자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는 재판 내내 ‘상투어(클리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입니다”“저는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불과했습니다”“저는 법과 규정을 충실히 따랐습니다.”“조국에 충성하는 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등의 무의미하고 틀에 박힌 말만 기계적으로 내뱉었을 뿐이죠.

이러한 상투어들은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흐리게 하고 체계적 악을 가능하게 만든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 그러나 그는 지적으로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을 뿐이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그의 심리 앞에서는 그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상투어(Klischee)와 관용어(Redensart)라는 튼튼한 벽 뒤에 숨어서 다른 사람들의 현존에 대한 현실 자체를 깊게 생각해볼 의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옮겨 적고 나니 좀 어렵네요. 어쨌든 그는 사유라는 걸 할 줄 몰랐고 그래서 당연히 자기만의 언어로 말할 줄도 몰랐습니다. 타인의 입장을 상상해보는 대신 이 무의미한 말들로 귀를 꽉 막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할 줄 아는 능력

이 이야기를 읽고 ‘아이히만 저 멍청하고 사악한 인간!’이라고만 생각하신다면 한나 아렌트가 좀 슬퍼할 것 같습니다. 왜냐면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군중 속에 있을 때 개인은 쉽게 무책임해집니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귀스타브 르 봉은 그의 저서 <군중심리>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군중 속 개인은 ) 혼자였다면 억눌렀을 본능을 따른다. 군중은 익명성을 띠기 때문에 무책임하게 굴기 쉽다. 개인을 항상 옭아매던 책임감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본능을 억제하는 경향도 사그라든다.

같은 맥락에서, 회사나 군대와 같이 정교하게 짜여진 시스템 안에 있을 때 개인의 책임감은 쉽게 분산됩니다. 큰 조직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하는 일의 최종적인 결과물이 가져올 파급 효과를 상상하기 어렵죠.

그래서 사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습니다.

특히 조직의 특성에 따라, 대표적으로 군대와 같이 상명하복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조직, 심지어 명령에 불복종하면 중징계를 받을 수도 있는 조직에서는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미처 비판적인 사고를 할 겨를이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그저 상관을 믿고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도 들고요.


결론

악의 평범성은 처음 소개되었을 때 많은 비판을 받았던 개념인만큼, 단순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결론은 우리가 늘 생각하는 능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군중 속에 있을 때, 거대한 시스템 내에 있을 때는 더더욱 말이죠. 악행을 주도하는 건 소수의 악마들이지만 그걸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건 사유를 멈춘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하니까, 또는 위에서 시키니까 별 생각없이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은 멍청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다수가 A라고 생각한다고 나도 A를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는 없습니다.

특히 가짜뉴스와 선동성 기사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정보가 넘쳐나는 지금 시대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입니다. 편한 길이 편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는 생각과 행동을 조금 더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이 행동이 가져올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다른 사람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해봐야 합니다.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요.

그럼 깊이 사유하는 능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휴튼이 던지는 좋은 질문들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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