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튼 레터]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4 - 스토아 학파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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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튼 아버지
2024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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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시리즈의 네 번째 글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고대부터 내려온 질문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자기만의 주장을 펼쳐왔습니다. 이 정도면 사색과 성찰의 중요성을 알았던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는 고대 때부터 시작하여 각 시대의 철학자들이 이야기했던 '좋은 삶'을 다뤄 보려고 합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다양한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한 주에 하나씩 소개드릴게요.

지난 레터의 주인공은 에피쿠로스 학파였고요, 네 번째 주인공은 이미 휴튼 레터에서 자주 다룬 스토아 학파입니다.


한 무역상의 좌절

기원전 334년 경, 키프로스의 키티온이라는 지역에서 앞으로 장차 크게 될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키티온의 제논(Zeno of Citium)'. 왜 이름 앞에 태어난 지명을 붙이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그 당시에는 철학자, 작가, 정치인 등 유명 인물들의 이름 앞에 출신지를 붙이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미레투스의 탈레스(Thales of Miletus)', '사모스의 피타고라스(Pythagoras of Samos)', '아테네의 소크라테스(Socrates of Athens)' 처럼요. 간지나네요.

제논은 성인이 되어 무역업을 시작합니다. 철학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상인의 길을 걷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날, 그의 배가 난파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로 인해 제논은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잃고 허망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다행히 키티온의 제논은 마인드가 건강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는 이후 물질적 소유보다는 정신적 탐구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전 레터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그리스는 '헬레니즘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통합한 거대한 영토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분열되며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었죠. 또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며 철학, 예술, 과학 등 여러 분야의 발전을 이룩했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주의가 강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철학으로 에피쿠로스 학파스토아 학파를 꼽습니다. 실제로 두 학파는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꽤 다른 면도 있습니다.

그럼 스토아 철학자들은 어떤 삶이 좋은 삶이라고 얘기할까요? 제가 이 관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 개념을 소개드리겠습니다.


1. 덕

또(!) 덕입니다. 이 지루한 단어가 모든 철학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걸 보니 아무리 진부해도 중요하긴 한가 봅니다.

스토아 학파가 얘기한 덕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지혜, 정의, 용기, 절제.

첫 번째, 지혜

지혜는 주어진 모든 상황에서 이성적 사고를 통해 최선의 판단을 내릴 줄 아는 능력입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죠.

우리는 사건에 감정적으로 대처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뉴스를 볼 때, 인스타에서 가십거리를 발견했을 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등 어떤 사안에 대해 시간을 두고 다각도로 고민해 보지 않고 감정이 이끄는대로 대처해 버리죠. 아니 대처도 아니고 그냥 '반응'이라고 해야 더 옳겠네요.

스토아 학파가 매우 경계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첫인상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 것. 물론 귀찮고 어려운 일이지만 첫인상에 반응하지 말고 더 깊게, 더 다각도로 살펴봐야 합니다.

두 번째, 정의

에피쿠로스 학파와 비슷하게, 스토아 학파도 공동체 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다만 결은 약간 다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자기들끼리의 공동체 의식을 중시해서 사회와 동떨어져 살았던 반면, 스토아 학파는 시민으로서 사회에 대한 의무를 중시하여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스토아 학파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철학자'라고 하면 맨날 자기들끼리 모여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만 할 것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스토아 철학자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스토아 철학자 중에는 성공한 사업가, 정치인, 작가 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로마의 가장 위대한 다섯 황제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벌집에 도움이 안 되면 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만큼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더 큰 집단, 내가 속한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라는 조언입니다.

세 번째, 용기

스토아 학파가 말하는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렵더라도 올바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라면 두려워도 해야 하는 것이죠.

실패할까봐, 거절당할까봐, 부끄럽고 민망해서, 무엇이든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많지만, 스스로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옳은 것이라고 여겨지면 즉시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이 스토아 학파의 조언입니다. 결과와는 무관하게요.

네 번째, 절제

스토아 학파는 '금욕주의'라고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이는 아마 스토아 학파가 절제를 중시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욕구(욕망)를 억누르라는 것이 스토아 학파의 주장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욕구를 이성적으로 조절하고,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 정확한 설명입니다.

진짜 금욕주의자라면 돈이나 명예를 추구하지도 않을 텐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스토아 철학자 중에는 성공한 사업가, 정치인 등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되 집착하지 말고, 떠나 보내야 할 때 미련없이 놔주라는 것이 스토아 학파의 조언입니다.

스토아 학파에 따르면 일상에서도 절제를 실천해야 합니다. 게으름을 부리고 싶을 때, 늦잠을 자고 싶을 때, 하던 일 다 던지고 유튜브나 보고 싶을 때, 야식을 먹고 싶을 때, 쏘맥 딱 한잔만 더 먹고 싶을 때 그 충동을 억누르고 '옳은 행동'을 하라는 것이죠.

저는 제가 스토아적 삶을 최대한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부끄러운 것들이 많습니다.

2. 아파테이아 (Apatheia)

어디 가서 아는 척 하기 좋은 단어가 또 등장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얘기한 아파테이아는 한 단어로 '평정심'을 의미합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제가 스토아 철학에 심취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사실 삶이 쉽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각자 자기만의 고통을 안고 하루하루 살고 있을 겁니다. 우리 스토아 아저씨들은 이렇게 삶이 던지는 수많은 역경과 고난에 지나치게 동요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지나치게 동요해서 감정적으로 반응하면 그릇된 결과만 얻을 뿐이니까요. 그들은 우리가 어려움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이성을 잃지 말고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얼핏 뻔한 말같은 이 이야기에 저는 꽤 많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제 삶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특히 그게 저에게 중요한 것일 때 저는 '하 ㅅㅂ 내 인생 왜 이러지? 왜 풀리는 게 없지?'라는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아요. 생각이라기보다는 그냥 감정적 반응입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게 상황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부정적인 감정이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곧바로 '그래서 지금 뭘 해야 하지?'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보다 큰 변화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지나간다", "마음에 파도를 만들지 않는다", "매사에 일희일비하지 말아라", 우리가 한번쯤 들어본 이 모든 얘기들이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와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3. 숙명론

마지막은 숙명론입니다. 제가 스토아를 공부하며 유일하게 갸우뚱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마치 드디어 내 이상형을 만났는데 딱 한 가지가 크게 아쉬운 느낌이랄까요.

숙명론은 모든 사건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입니다. 즉 세상 모든 사건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죠. 다소 종교적이기도 한데 아마 그 당시는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서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건 근거 없는 제 생각입니다)

저는 좀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여전히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겠습니다. 모든 게 정해져 있으면 고분고분 편하게 살지 뭐하러 노력하나요?

다만 다행히도, 숙명론과 함께 붙어다니는 중요한 개념인 '자유 의지'가 추가적인 해석의 여지를 줍니다. 즉, 모든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발생하지만, 그 사건에 대처하는 나의 행동은 자유 의지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절반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스토아 학파의 또다른 중요한 개념인 '통제의 이분법'이 등장합니다. (쓰고 보니 다 중요하다고 해놨네요) 세상 모든 것을 (1)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2)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나누고,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사건에 집착하는 것은 무의미하니까요.

마치 양궁 선수가 매일 훈련하고 매일 자기관리를 할 수는 있지만, 경기에서 활시위를 놓은 이후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양궁 선수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자신의 행동생각 뿐,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 과녁으로 날아가는 도중에 맞는 바람과 그 외의 외부 변수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저의 또 다른 정신적 지주인 니체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후반부에 다룰 예정이지만, 니체 철학의 중요한 개념 중 '아모르 파티(Amor Fati)'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나에게 주어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저앉아서 세상 탓만 하고 있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이것도 생각해 보면 평정심(아파테이아)와 같은 맥락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토아 철학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레터가 엄청 길어졌네요. 사실 정신없이 쓰고 나니 이 분량의 두 배가 넘었는데 자르고 잘라서 이 정도입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해서 이대로 발행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반응은 제가 통제할 수 없으니까요.

결론은, 스토아학파가 얘기한 좋은 삶이란 평정심을 유지한 채 네 가지 덕(지혜, 정의, 용기, 절제)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는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죠.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 오직 나의 행동생각 뿐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외의 것은 모두 통제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집착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오늘은 스토아 학파가 얘기한 네 가지 덕 중 하나인 '절제'에 대한 질문을 준비했습니다. 요즘 나 자신을 어떻게 절제하며 관리하고 있나요?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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