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튼 레터]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3 - 에피쿠로스 학파
요즘 내 정신적 평온을 해치는 것은 무엇이 있나요?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시리즈의 세 번째 글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고대부터 내려온 질문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자기만의 주장을 펼쳐왔습니다. 이 정도면 사색과 성찰의 중요성을 알았던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는 고대 때부터 시작하여 각 시대의 철학자들이 이야기했던 '좋은 삶'을 다뤄 보려고 합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다양한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한 주에 하나씩 소개드릴게요.
지난주의 주인공은 아리스토텔레스였고요, 세 번째 주인공은 '쾌락주의'로 잘 알려진 에피쿠로스(학파)입니다.
대왕의 죽음
기원전 323년 6월 10일, 13년 간의 정복 전쟁을 통해 그리스에서 인도 서부까지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32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스무 살(!)에 왕위를 계승받아 정복 활동을 시작했다고 해요. 돌아보니 저는 만 스무 살이면 술 먹고 동아리방에서 전공책을 베개 삼아 신문지를 이불 삼아 자고 있었네요.
그가 지배한 영토는 지금 봐도 정말 엄청난 규모입니다.
하지만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던 지도자가 사라지면 그 사회에는 큰 분열과 혼란이 찾아오는 법. 그가 사망한 후 제국은 여러 왕국으로 분열됩니다. 이곳저곳에서 전쟁이 터지고, 사회적/정치적 불안이 심해졌습니다. 이 시기를 후대 사람들은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릅니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 이전 시대와 꽤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그리스는 여러 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무슨무슨폴리스' 들어보셨죠? 폴리스(polis)가 바로 도시국가를 의미합니다. 하나의 중심 도시와 그 주변 농촌 지역을 포함하는, 이 작은 단위의 도시국가들은 각자 자기들만의 독립적인 정부, 법, 군대, 화폐 등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구 수가 워낙 적다 보니 이들은 직접 민주주의(국회의원과 같은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 아닌, 모든 시민이 직접 정책 입안이나 법률 제정에 참여하는 방식)를 구현하고 발전시켰습니다. 또 소수의 단일 민족끼리 공동체를 이루어 사니 각 개개인은 매우 강한 소속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차 붕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도시국가 체제는 무너지고 '왕국'이라는 새로운 정치 단위가 생겨났습니다. 도시국가와 달리 왕국은 그 규모가 훨씬 컸고, 강한 군주의 통치 아래 놓여있었습니다.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었죠. 또, 이전의 강한 공동체 의식보다는 왕에 대한 충성심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에피쿠로스의 등장
사회가 크게 변하면 새로운 철학이 등장합니다. 기존에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무너졌으니 다시 새로운 믿음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죠.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기 18년 전, 지중해의 한 섬에서 에피쿠로스라는 아기가 태어납니다. 어릴 때부터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에피쿠로스는 혼돈이 지배하는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점차 자기만의 철학을 확립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헬레니즘 시대에는 개인주의가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앞서 말씀드린 사회의 큰 변화 때문인데요, 먼저 왕국이라는 정치 체제의 등장과 함께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개인들은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게 되며 정치적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또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을 건설하며 외부 문화가 흘러들어왔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섞이며 통일된 정체성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개인주의가 짙어졌죠. 아마 우리나라에 비해 미국이 개인주의가 강한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우니 자연스럽게 내면의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은 국가나 공동체보다는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더 중시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사회적 변화에 발맞춰, 에피쿠로스는 자신만의 철학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에피쿠로스가 만든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 중, 이 시리즈의 주제와 맞는 키워드 세 가지를 소개드립니다.
1. 쾌락주의
에피쿠로스 학파를 가장 잘 나타내는 키워드는 바로 '쾌락주의'입니다. 그들은 좋은 삶이란 쾌락이 극대화되고 고통이 최소화된 삶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쾌락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에게 쾌락이란 단순히 감각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감각적인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몸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불안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에피쿠로스 학파는 절제와 자제력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순간적인 쾌락보다는 장기적인 만족을 추구했습니다. 당장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보다 나에게 지속적으로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과식은 순간적인 즐거움을 줄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 지양해야 합니다.
그는 우리가 가진 욕망을 세 가지로 분류했어요.
1.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
2. 자연적이지만 불필요한 욕망
3. 자연적이지도, 필수적이지도 않은 욕망
그리고 당연히 첫 번째 유형의 욕망만을 충족시키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보았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때에 따라 허용될 수 있지만, 세 번째 유형은 완전히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종류의 욕망을 빠짐없이 다 갖고 있는 걸 보니 저는 이번 생에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되기엔 틀린 것 같습니다.
2. 정신적 평온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부르는 정신적 평온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또다른 핵심 개념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말한 좋은 삶이란 정신적 평온 상태를 유지하는 삶입니다. 어려움이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평온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삶이죠.
그럼 우리의 정신적 평온을 가장 크게 해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에피쿠로스는 과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 현재의 평온을 해친다고 했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만이 우리의 것이다."
(왠지 스토아 철학과도 비슷해 보이지 않나요? 실제로 스토아 학파는 헬레니즘 시대에 에피쿠로스학파와 공존했던 학파입니다. 이미 여러 레터에 걸쳐 다루었지만 다음 레터에서 간단하게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렇듯 걱정과 불안, 후회가 현재의 정신적 평온을 해치는 주범입니다. 그럼 이 녀석들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에피쿠로스학파는 '단순한 삶'을 권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자연친화적인 삶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자연과 가까이 살아야 한다고 말했고, 실제로 아테네 외곽의 정원같은 곳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살며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도시 지역에 살고 계신다면 공감하겠지만, 가끔 도시의 소음과 복잡함에서 벗어나 산이나 바다 같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온해지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보았던 것이겠죠.
3. 우정과 공동체
특이하게도 에피쿠로스 학파는 '우정'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좋은 삶을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 필요하다면서요.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은 실제로 정원같이 생긴 "정원"이라는 곳에서 소규모 공동체를 만들어 외부로부터 동떨어진 생활을 했습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살았던 것이죠. (그래서 사회 참여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들이 우정과 공동체를 중시했던 이유는 아타락시아와도 연관이 있을 겁니다.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느낌, 즉 불안과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안정감, 정신적 평온을 느끼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에피쿠로스 학파는 단순한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는, 깊은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우정을 강조했습니다.
사회적 배경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헬레니즘 시대는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고 개개인이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면서 개인의 정체성도 흐려지고요. 그래서 진정한 친구와 소속감에 대한 갈망이 더욱 강해졌을 겁니다.
서울에서 동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모여사는 마을을 만들려면.. 일단 돈부터 많이 벌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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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에피쿠로스 학파가 얘기한 좋은 삶이란 정신적 평온을 유지하는 삶입니다. 이를 위해 장기적인 만족을 추구하되 불필요한 쾌락을 탐닉하지 않고, 진정한 친구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단순한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한 것이죠. 모든 것이 과잉인 지금 시대와는 정반대인, 그래서 더 소중한 관점의 철학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요즘 내 정신적 평온을 해치는 것은 무엇이 있나요?
새로운 철학자와 함께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